1. 사림[士林]이란
사림[士林] = 유교를 닦는 선비 집단
<<고려사>>의 유학을 닦은 관료에 대한 표현
유사(儒士), 유신(儒臣), 유학자(儒學者) 과 같은 표현 사용.
->麗末 ,신유학(新儒學)의 도입 이후
사대부(士大夫), 사인(士人), 사류(士類), 사족(士族)
※ 신유학이 수용되면서 고려의 문사들도 사
사화, 후기에는 당쟁으로 일관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역사에서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론이다. 당쟁론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쟁의 기원은 선조 이전인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는 본래 사사로운 권력의 쟁탈이었다. 정치가가 한 번 정치를
1. 근현대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신권을 훈구파와 사림 두 세력으로 나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에 훈구파가 사림을 탄핵하기 위한 노력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이에 성공하여 사림이 큰 화를 입은 것이 조선사를 통틀어 크게 4번이 있는데 이를 사림의 화, 줄여서 사화라고 한다. 4대 사화는 아래와
사림의 세력이 강화되어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국이 되었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로 한번도 정복왕조가 들어서지 않아 귀족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에 국왕과 재상에게 눌려 오던 사림들이 투쟁의 대상을 잃고 스스로 분열하여 당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Ⅱ. 조선 당쟁(붕당정치, 사림정치)의 정
1) 사화의 의미
사화란 사림(史林)의 화(禍)를 줄인 말이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은 문을 숭상하고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유림이 중심이 된 사회였으나 이들은 각자의 사상과 감정, 또는 지연 등을 연고로 하여 파벌을 형성했으며 서로 논쟁하고 대립, 투쟁하면서 서로를 반역으로 몰아 목숨까지
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 문인이라는 이유로 장형(杖刑)을 당하고 평안북도 희천으로 유배된다. 다시 47세에 전라남도 순천시로 유배지를 옮긴다. 이 시기에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도학을 가르쳐서, 조선에서 도학의 정통을 이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후에 51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농민들이 전호(佃戶:소작농)로 전락했으며 훈구파들의 대토지 소유로 중소지주였던 사림파의 지방 기반을 크게 위협했다. 즉 사화(士禍)는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 토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파는 4대 사화를 극복하고 명종 말엽에 이르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